▲ 서대남 편집위원
1963년 7월 24일, 대한조선공사(대표:이영진)가 우리나라 기술진에 의해 최초로 건조한 화물선 '신양호'의 명명 및 진수식은 한국조선사 및 해운사에 기록된 일대 쾌거였고 길이 77m, 선폭 12.2m는 당시 최대 규모의 대형선이었으며 일본과 동남아 항로에 취항하여 해상운송의 기린아로 각광을 받다가 76년 3월 31일 동경만 입구에서 일본 화물선과 충돌하여 인명 피해 없이 침몰은 했지만 1978년 해운진흥법에 의한 본격적인 계획조선사업 이전에 정부 지원 자금으로 건조된 최초의 선박으로 기록되고 있다.

한편 2020년 4월 23일 대우조선해양 (대표:이성근) 거제조선소에서 24,000TEU급, 길이 400m의 세계 최대 컨테이너 전용선인 HMM(대표:배재훈)의 '알헤시라스(Al-Hesiras)'호가 명명식을 가진 후 만선으로 출항했다는 감격적 보도를 접하면서 문득 57년 전에 한국 최초로 정부 주도하에 건조됐던 신양호가 '동양호'와 함께 국내 건조선으로 우뚝 섰던 시절을 비교하며, 필자는 감개무량함과 아울러 엎치락 뒷치락 끝에 우리나라가 아직도 부동의 세계 제1위 조선국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는 자긍심과 안도감에 기쁨을 금할 길 없는 감격으로 가슴 벅차다.

 
정부 주도 경제개발계획 사업으로 1962년초에 착공하여 2년간에 걸쳐 건조된 신양호는 64년 5월에 준공된 자매선 '동양호'와 함께 즉시 한일간 항로에 정기 배선되었고 그간 낡은 소규모 중고선에만 의존하여 운항선복 부족을 면치 못하던 동 항로의 운송력 증강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었다. 세계 조선 최고 국가로 조선왕국을 구가하는 오늘에서 보면 2천톤급에도 못 미치는 소형선 몇 척을 우리가 지었다고 떠들면 우습겠지만 60년대 전반 당시 신양호의 국내 건조는 어쨌든 조선과 해운 발전에 신기원을 이룩한 획기적인 발전임에 틀림 없었다.

 
당시 국내 건조능력은 조선공사가 1963년 7월에 준공하여 부산/울릉도간에 취항한 400톤급 화객선 청룡호가 최대선이었기 때문에 신양호 같이 큰 배가 그렇게 빨리 건조되어 안전하게 해송 항로에 투입된 것은 크게 대단한 일로 꼽힌다. 1961년 박정희 대통령이 "바다위에 떠있는 우리나라 해상운송용 배는 모두 얼마쯤 되느냐?"고 묻자 당시 교통부장관은 약 10만톤 정도가 된다고 보고했다는 사실은 현재 1척이 무려 3~40만톤에 이르는 현실과 비교하면 우리의 조선 능력의 기적에 가까운 놀라운 성장과 도약은 참으로 감격 그 자체라 하겠다.

지금이나 예나 국내에서 가장 큰, 제1항, 모항, 부산항에도 드나드는 배들은 일본 선박이 판을 쳤고 당시 사실은 '배가 부족한 게 아니라 배가 없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정도로 선복량이 모자랐고 쓸만한 배는 더욱 태부족이었다. 정부 당국이나 해운업계가 선박 증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공감대는 가졌으나 건조능력, 조선기술, 자금마련 등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국내 건조를 회피하고 가장 손쉬운 선박 취득 방법으로 외국 중고선을 사 들이거나 외상으로 구입하는 사례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신양호 탄생의 역사를 얘기하려면 아득히 60년을 거슬러 올라, 70년 이상을 오로지 해운에 몸바쳐 지금도 영원한 현역으로 활동하는, 한국해대 항해학과 제2기 졸업, 현 KCTC 신태범(愼泰範) 회장과 한국해대 항해과 제1기 졸업, 박현규(朴鉉奎) 한국해사문제연구소 이사장 등 살아있는 해운계의 전설이요 양대산맥인 이들 쌍두마차를 빼고는 60년대 후반에 밥벌이를 시작한 필자로선 선사시대(?) 역사를 알 길이 없지만 그래도 자주 만나 많이 전해들은 신양호의 추억과 연결, 때마침 알헤시라스호가 수에즈운하를 통과했다는 낭보를 듣고보니 한국 조선과 해운의 동시 발전에는 참으로 격세지감과 감동이 앞선다.

신양호를 잉태하는 첫 단계부터 탄생까지 산파역을 맡았던 신 회장은 졸업 후 1950년에 바로 대한해운공사(KSC)에 입사하여 12년간을 근무하던 마지막 해인 1962년에 침몰된 3,827총톤 군산호를 인양하여 조선공사에 수리를 맡기고 이의 수리 감독을 위해 심신을 다해 전력을 기울였었다. 1957년에 건조, 묵호항 정박중 1,800총톤 도계호와 충돌, 두척 모두 침몰로 전손처리된 폐선을 다시 사용토록 영도 선거에 입거하여 수리하는 공정은 신조와 다를 바 없었다고 한다.

선명을 대포리호로 바꿔 선장이 된 신태범은 기관학과 출신 동기 김경천(金敬千) 기관장과 함께 수리 공정을 감독하면서 조선공사의 수리능력과 종업원들의 작업 태도에 감탄하며 이들이 대형선박 건조도 가능할 것이란 확신을 갖게 됐다고 했다. 현역 대령 계급장을 단 채 조선공사 사장직을 맡은, 평양사범학교 출신의 이영진은 군인답게 의욕은 컸으나 일거리가 없자 신 이 두 사람은 패전 후 일본서 장기저리의 정책금융을 배정받아 시행하고 있던 계획조선을 자주 화제로 삼은 게 신양호 태생의 단초가 됐었다는 것.

때는 마침 '우리 화물은 우리가 만든 우리 배로 운송'이란 정책 캐치프레이즈가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이를 실천에 옮겨 보자고 결심한 신태범은 관련 문헌을 뒤지고 ABS(미국선급협회) 박남석 검사관의 기술 자문을 얻어 조선공사의 시설을 검토하고 난 후 이곳에서 2,000톤급 선박의 건조가 가능하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박현규로부터 그의 초등학교 동창 김철수 상공부 조선과장을 소개 받았고 이어 그가 입안한 '조선5개년계획'이 1962년 4월 2일, 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에 포함되었다. 상공부가 공고한 1962년도분 제1차 실수요자 공모 내용은 1,600총톤급과 500총톤급 화물선 각 1척으로 1962년 6월 7일 정래혁 상공부장관 명의로 조선공사에 시달되어 본격화 된다.

이어 후임 박충훈 상공부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선장려위원회에서 결정한 실수요자로 신태범이 선정되었고 총 선가 1억1천만원 중 융자금 50%, 보조금 40%의 자금 지원을 받게 됐으며 부족한 자기자금 10%는 당시 동향의 조개표석유 대표 신중달(愼重達)과 양재원(梁在元) 부산비닐 사장이 지원하여 순조롭게 건조되었다. 그때 10%면 선주가 될 수 있다니까 신청 건수가 무려 20배를 넘었으나 막상 마감을 하고 보니 실제 경쟁에 뛰어 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10%라는 자기부담도 컸거니와 조선공사의 선박 건조능력에 대한 확신도 낮은 때문이었다.

신양호 건조기간 중 신태범은 도크내에 숙소를 정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건조 현장에 매달려 동형의 유사한 선박이 부산항에 입항할 때마다 조선공사 기술진을 데리고 직접 승선하여 일일이 그 배의 기관과 비품, 의장품을 점검하고 확인하며 열과 성을 다했다고 지난날을 술회한다. 문안차 필자가 가끔 박현규 이사장과 신태범 회장 사무실을 방문하면 신 회장은 당시 신양호 건조와 관련된 전 과정과 물품구입 가격 및 공정 등 일체를 깨알같은 글씨로 낱낱이 메모한 노트를 필자에게 열어 보이며 신태범의 분신이자 젊은 시절의 추억이기도 한 신양호를 탄생시킨 4인방, '신태범, 박현규, 김철수, 이영진' 이야기가 이제는 해운 동화 속으로 묻혀가지만 당시를 회상하며 그 시절 얘기가 나오면 당시를 설명하기에 열을 올린다.

마침 신태범이 해공의 선장직을 떠나 사업가로 입신 준비를 하던 때라 신중달 명의로 타임리에 신양호 인수가 무난했다고 했다. 이때 신양호 외에 500총톤급 화물선 실수요자로는 남성해운(대표:김영치)이 선정됐으며 신양호의 1964년 2월 22일 완공 후 남성의 우양호는 5월 15일에 완공됐었다. 그리고 1차분 선박 건조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이어 해운사들이 너도 나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부산과 목포간 연안 여객선을 운영하던 고려해운의 이학철(李學喆) 사장이 신태범을 찾아 자문을 구한 결과 고려해운이 1,600톤 동양호 1척을, 500톤급 1척은 천경해운 김윤석(金允錫) 사장이 차지했었다는 것.

그리고 신태범이 건조한 신양호(1,597총톤)와 이학철의 동양호(1,597총톤)와 기존의 은양호(833총톤) 등 3척이 모두 한 법인 고려해운 소속으로 운항을 개시하여 고려해운은 중견선사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됐다. 신양호 취항 후 갑자기 환율이 달러당 130원에서 155원으로 인상되어 선가 상환에도 별 어려움이 없어서 참으로 어렵고 힘들게 탄생시킨 신양호는 큰 행운이었단다. 60년대 후반에 교통부 출입기자를 계기로 해운에 조인한 필자도 당시 우리의 조선 능력이 1,600총톤을 대형선으로 취급하며 이를 건조하기에도 벅찼다는 시절을 뒤늦게 회상하며 70년대 하늘을 찌르던 우리 조선과 해운의 발자취를 다시 한번 더듬어 본다.

이제 글로벌 조선의 메카로 군림하는 우리나라는 현재 세계 10대 조선소 중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STX조선, 현대삼호, 현대미포, 성동조선해양 등 한국이 거의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이번에 대우조선해양에서 건조한 알헤시라스는 대내외적으로 숱한 어려움을 겪으며 장기 해운불황의 늪에서 힘들어 하는 대한민국 해운의 재도약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어 앞으로 계획된 초대형 컨테이너선을 계속 투입하게 되면 내년 현대중공업으로부터의 16,000TEU급 8척의 인도와 함께 HMM(현대상선)의 대외 경쟁력은 크게 강화될 전망이다.

특히 이들 선박들은 HMM의 운송능력을 향상시키면서 스케일 메리트를 통한 비용 경쟁력과 최고의 연비 효율성을 갖춰 원가 경쟁력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니 우리 해운도 이제 쨍하고 볕들 날이 가까워진 것 같아 고무적이다. 또 이들 초대형 컨테이너 선박들은 선주가 육상에서도 항해 중인 선박의 메인 엔진, 공조시스템, 냉동 컨테이너 등 주요 시스템을 원격으로 진단하여 선상유지 및 보수작업을 지원할 수도 있고 최적 운항경로를 제안해 운항경비를 절감할 수 있는 '스마트 내비게이션 시스템'과 개방형 사물인터넷(IoT) 기술이 적용된 스마트 플랫폼을 활용하면 다양한 소프트 웨어와 쉽게 연결, 호환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HMM 알헤시라스와 함께 운항을 개시한 세계 최대 제2호선 HMM 오슬로(Oslo)와 제3호선 HMM코펜하겐(Kopenhagen)과 함께 앞으로 총 20척의 선박 인도가 완료되고 세계항로에 모두 투입되면 현재의 선복량 45만TEU가 약 90만 TEU로 배가되고 추가 발주 및 용선을 통해 2022년까지 약 110만TEU 수준으로 화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주 1회 서비스는 물론 HMM의 이같은 네트워크 구축은 한국해운 재건을 전세계에 알리는 신호탄으로 위상을 드높이며 세계 해운 글로벌 최강자로 부상하여 국가경제 전략산업으로서의 해운 입지를 더욱 공고히 구축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또 하나 필자가 잊을 수 없는 취재기자 시절의 잘 알려진 에피소드 한 토막. 대형조선소를 만들 계획만 세우고 착공도 하기 전에 현대 정주영(鄭周泳) 회장이 선주에게 보여줄 울산 미포만 백사장의 조선소 후보지 사진 한장과 5만분의 1 지도 한장, 그리고 우리 돈 500원짜리에 그려진 거북선을 가리키며 한국은 영국보다 300년 먼저 16세기에 이미 철갑선을 만든 경험이 있다고 장담하며 스코트리스코에서 작성한 26만톤 짜리 유조선 도면 한장을 달랑 들고 끝내 스위스 몽불랑의 한 별장으로 당시 그리스의 선박왕 조지 리바노스 회장을 찾아 건조계약을 체결, 세계적 오일쇼크로 비록 인도는 실패했지만 '아세아상선(현대상선)'을 탄생시킨 '코리아 선'과 '코리아 스타'와 '코리아 배너' 등 26만톤급 VLCC 세척을 건조했던 1972~74년이 너무나 생생히 기억난다.

지금 이 순간도 '신양호'에서 '알헤시라스'까지 한국해운 57년간을 비교적 가까이서 관심 갖고 지켜보고있는 필자의 심경은 옛 70년대 국가 기간산업으로서의 무역확대와 해운 성장기의 영광이 재현되는 감격시대를 하루라도 속히 앞당겨 맞이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과 소망뿐이다.

<서대남(徐大男)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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